고현권 목사
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 중에 하나를 들으라면 모든 사역이 다 끝난 주일 저녁에 식사를 마친 후에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 리그의 주말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예술 축구(art soccer)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특이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경기를 나서는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 가슴 부위에 붉은 색의 꽃 무늬가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그 꽃이 다름 아닌 양귀비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11월이 되면 양귀비 꽃 무늬를 박은 유니폼을 입고 축구 경기를 하는 지 그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한 청년의 저격을 받고 숨지면서 발발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4년여 동안 치러진 전쟁에서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96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린 곳이 바로 프랑스 서부 전선입니다. 이것을 모티브로 해서 나온 책과 영화가 바로 “서부전선 이상 없다!”입니다. 그런데 이 서부전선에는 유달리 붉게 불든 양귀비 꽃이 온 들판을 뒤덮었다고 합니다. 어떤 작가가 이 모습을 보고서 양귀비 꽃이 붉은 것은 다름 아닌 전선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의 피 때문이라고 영감을 펼쳤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를 기해서 종전 선언이 발표되고 전쟁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 날을 “종전 기념일”(Armistice Day) 혹은 “참전용사 기념일”(Veterans Day)로 지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않기 위해 종전이 선언된 11월에 양귀비 꽃을 단다고 합니다.
“물망초”(勿忘草)라는 꽃이 있습니다. 한자가 이미 그 뜻을 알려주는 것처럼, 꽃말이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don’t forget me)입니다. 사랑하는 임경서 장로님이 떠난지 두 주 반이 지났습니다. 몸은 떠났지만 그 분의 믿음과 헌신과 순수함은 절대 잊을 수 없음을 더욱 절감하는 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