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고현권 목사
제가 저희 교회에 부임한 직후에 한 장로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교회의 모든 집회 때에는 꼭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장로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오늘까지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주중 새벽기도회 때에도 언제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라틴어 사도신경은 “credo”(크레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옮기면 “I believe”(나는 믿습니다)입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일종의 “러브 레터”입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거룩한 공회”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입니다. ‘교통’하면 우리의 마음에 당장 떠오르는 그림이 차들로 붐비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번역의 오류입니다. 사실 교통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담고 있는 차원 높은 말입니다. 교통(交通)은 문자 그대로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 풀이하면, “통하면 통증이 없고, 통하지 않으면 고통스럽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오장육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로서, 특히 교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삶의 배경에 처해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 몸,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기에, 더더욱 교통(交通)의 중요성이 절실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당회원들과 남자 집사님들이 함께 모여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모임의 성격이 자칫 잘못하면 지적과 비난, 방어와 반박, 그 마지막은 반목과 갈등의 증폭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집사님들과 당회원들이 너무나 성숙한 모습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 말 그대로의 “교통”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의 제약으로 다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런 시간을 가진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했습니다. 소통(疏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어졌던 것이 다시 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소통의 모임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