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하신 비유 속에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11: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강청(强請)의 영어단어가 “persistence”인데, 이 말의 뜻은 “끈득거지게 매달림”입니다. 많은 분들은 이 말씀을 “강청기도”의 근거로 삼습니다. 강청기도란 응답을 받을 때까지 끊질기게 매달리는 기도를 뜻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도는 그런 자세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고(故) 박윤선 박사님의 기도에 대한 설교집 제목이 «기도, 죽기내기로 기도하라»입니다. 참고로 “죽기내기로”는 “죽기 살기로”의 평안도 사투리라고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고령의 나이에도 밤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신학교 뒷동산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새벽까지 죽기내기로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참 귀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강청의 헬라어 단어는 “아나이데이아”입니다. 이 말의 뜻은 “shamelessness” 즉 “파렴치”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최대의 미덕은 손님 대접이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에 대해 대접하는 것을 외면하면 이것은 그 개인은 물론이고 그가 사는 동네 전체의 수치가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서 그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때문에 빵을 빌려달라는 친구의 요구를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사람도 자신의 명예가 손상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귀찮은 요구를 들어줍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신이라는 불명예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만큼 하나님께 수치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이것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간절하게, 끊임없이, 심지어 뻔뻔하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강청 기도, “아나데이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