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譜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학은 한 가문의 가계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그 집안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인물 중심으로 풀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가문이 다른 가문과 결혼이나 학맥을 통해 어떻게 연결되고 관계를 맺었는지를 살핍니다. 보학의 연구 대상 가문은 명문 가문입니다. 그 집안의 내력과 인물, 그리고 다른 가문과 맺은 혼맥과 학맥을 통해 그 집안이 명문가문인 이유를 밝힙니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18세기 미국 최고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목사님의 전기를 틈틈히 읽고 있는데, 18세기 초반 미국의 중심이었던 뉴잉글랜드의 최고의 명문가들이 결혼을 통해서 인맥을 공공히 하며 그 지위를 더 강화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의 가문이 그 대표적인 미국의 신흥 명문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 집안과 혼인하는 일이 없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때에,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너무나 보잘것 없습니다. 지난 주보 컬럼에서 왜 마태가 족보를 생명처럼 중시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형편없는 족보를 당당히 드러냈는지 그 첫번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이유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감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미 본 것처럼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윤리 도덕적인 허물이 많은 여인들과 심지어 이방여인들까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비천하고 허물투성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리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여인들을 사용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감 때문입니다. 아무리 엉터리처럼 보이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붙잡으시면 능히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하나님의 자신감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 동일한 자신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