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권 목사
몇 주 전에 기독교문사를 들렀다가 성경묵상을 돕는 정기 간행물인 “매일성경”을 받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보니 매일성경을 정기 구독하는 분들이 제법 되어서 내심 참 기뻤습니다. 새벽기도시간에 매일성경에 나온 본문의 순서대로 말씀을 전하고 있고, 새벽에 나올 형편이 되지 못하시는 분들은 집에서 매일성경을 가지고 그 날 주어진 생명의 양식을 먹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정기구독 신청자의 수가 배가(倍加)되는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 이번 11.12월호는 시편을 가지고 두주간 묵상한 후에, 한 장으로 된 오바댜서를 거쳐, 신구약 성경 계시의 완성과도 같은 요한계시록을 다루게 됩니다.
이번 한 주간 시편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시139편을 통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無所不在, Omni-presence)라는 속성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오는 은혜인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라틴어 문구가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였습니다. “코람 데오”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coram=before + Deo=God)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니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지만,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의식할 때에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 있고,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쳐죽인 후에,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이 이렇게 시치미를 잡아 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동생을 살인한 범행장소인 “들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들판이란 단어는 언제나 “수풀”이나 “들짐승”과 연계되어 쓰입니다. 들짐승이 살만큼 수풀이 우거진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시치미를 잡아 뗀 것입니다. 그러나 우거진 수풀도 주님의 눈과 임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눈길과 임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 “코람 데오의 삶”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