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의 하나가 찬133장입니다. 특별히 3절을 부를 때마다, 제 목이 메이곤 합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를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주셨네.” 여기 등장하는 도마(Thomas)에게 붙은 형용사는 “의심 많은” 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와서 평강을 선포하셨을 때에,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돌아온 도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흥분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이것 때문에 그가 얻은 별명이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였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팔 일이 지났습니다. 마침 제자들이 다 한 곳에 모안 가운데,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인사를 나눈 후에 곧장 도마에게 다가가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부활을 의심하는 못난 제자 도마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심을 책망치 않고 믿음의 회복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상처 자국난 몸을 만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몸에 난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만지고 난 도마가 고백한 말이 바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종종 도마와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만지고, 느껴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분들입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 근거가 없으면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정당한 의심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체험해야 믿는 성격을 그대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의 수준까지 눈높이를 낮추어서 그의 의심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