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번 추수감사 주일 칼럼은 무엇을 적을까 고민하다가 작년 추수감사주일 설교 노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읽어본 설교 내용이 참 좋아서 그중 일부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제 아내의 최대 불만은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딱 좋은 사이즈인데, 본인은 늘 키에 대해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딸들이 태어날 때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성질은 자신을 닮고, 키는 아빠를 닮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다리를 매일마다 열심히 주물렀습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예수님은 염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기 키라는 말은 헬라어로 “헬리키아”인데, 이 말에는 “생명의 길이”(span of life)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누가 염려한다고 자신의 생명의 길이를 한 시간 더 연장할 수 있습니까? 생명의 주권은 오직 주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어진 시간을 감사함으로 잘 누리다가 오라고 부르시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에 붙잡혀 있는 것이 바로 염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또 하나의 비유가 백합화의 이유입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로 만들지도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 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눅12:27,28) 흔히들 백합화하면 찐한 향기를 발하는 나팔모양의 흰색 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번역하면 들판에 핀 야생화입니다. 야생화는 누가 씨를 심고 물어주어서 기른 것이 아닙니다. 메마른 땅에 씨가 묻혔다가 우기가 되어 비가 내리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런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신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를 방치하는 부모는 수치를 당합니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돌보지 않으시면 그 일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자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알진대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염려는 믿음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