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사랑은 달콤한 환상이 아니라 치열한 현실입니다. 사랑은 수고와 희생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제가 책을 보다가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교육가인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교육철학의 고전과도 같은 «에밀»을 쓴 사람입니다. 그는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가 마리 테레즈라는 여인과 낳은 다섯 자녀를 모두 파리의 고아원에 맡기고 끝내 외면합니다. 이 사실을 알려지면서 지탄을 받자 그가 이런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무능한 가장 밑에서 자녀들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너무나 비겁한 사람이지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여준 사랑의 수고를 칭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실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서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중요한 힌트를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직접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음성으로 가르치신다는 뜻일까요? 이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사랑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울컥합니다. 바로 그때에 성령께서 도전을 던지십니다. “감동으로 끝나선 안돼. 너도 그렇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돼.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야.” 이것을 가장 잘 담은 말씀이 요일4: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즘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각 구역마다 사랑의 수고를 실천 손길들이 넘쳐남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