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제 신학교 동기들 단체 카톡방에 한 분이 감동적인 이야기라면서 글을 올렸습니다. 내용은 미국감리교회 파송을 받아서 충청도 공주 땅에서 귀한 선교를 하셨던 프랭크 윌리암스 선교사(Frank Williams)와 그의 아들 조오지 윌리암스(George Williams) 박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제 동기 목사님이 올린 글을 읽다가 보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프랭크 윌리암스 선교사(한국명 우리암)가 공주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던 중에 비를 피해 상여집에 들어갔는데, 며칠전에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데 사용했던 상여를 보관하였기에 그만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슬픔을 딛고 공주에서 계속 선교를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교회사를 전공한지라 이런 것은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자료를 조사해보니,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은 선교사는 우리암 선교사가 아니고 그의 선임자로 공주 지역에 왔던 캐나다 출신의 샤프 선교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글을 올린 이가 전임자인 샤프 선교사와 후임자인 우리암 선교사를 혼동하였다고 추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기 목사님들에게 정정한 글을 올리면서 설교에 인용할 때 참고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샤프 선교사가 급작스럽게 소천한 후에 후임자로 공주에 부임한 우리암 선교사는 전임자가 세운 학교 이름을 영명학교라고 개명합니다. 여기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유석 조병옥 박사입니다. 우리암 선교사는 1942년에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지만, 다시 버어마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갈 정도로 선교에 헌신적인 분이었습니다. 우리암 선교사가 1906년에 한국 땅에 들어왔는데, 그 다음해에 인천에서 낳은 아들에게 ‘우광복’(禹光福)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14살때까지 공주 영명학교에서 한국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이것때문에 우광복은 한국어에 능통했습니다. 청소년기에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우광복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미군정청장인 하지장군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기독교 인재들을 등용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94년 별세하면서 자신을 공주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그는 현재 공주 영명학교 뒷동산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헌신 위에 오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있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깁니다. 한국에 갈 기회가 생기면 공주 영명학교와 우광복 박사의 묘역을 방문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