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서 아내와 의기투합한 것이 자녀를 셋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한지 2개월후 첫 아이를 가졌는데 중간에 그만 유산하고 말았습니다. 미시간으로 유학온지 2년이 지나서 첫 딸을 낳았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를 위해 필라델피아로 이사온지 반년이 지난 시점에 아내가 둘째를 가졌습니다. 점점 불러 오는 배를 보던 교회 권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들 배’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기다리던 아내의 얼굴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러나 낳고 보니 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셋째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때도 권사님들이 아내 배를 보더니 이번에는 확실히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니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셋째도 딸이었습니다. (제가 그 다음 주일에 장을 들고 교회에 가서 그 권사님을 찾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우리가 계획하던 것이 이루어졌다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목회를 위해 남가주로 이사하여 부목사로 열심히 섬기던 때에 뜻하지 않게 넷째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목회자 형편에 아이 넷을 어떻게 키울까 하는 생각에 눈이 아득하기도 했지만, 감사하게 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나중에 자주 한 말이 있습니다. “막내를 낳지 않았으면 어쩔번 했어!” 넷을 키우는 것이 버거웠지만 저희 부부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막내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딸의 대학 입학을 위해 휴가를 얻어 보스톤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이삿짐을 가지고 기숙사로 가서 함께 방을 정리하였습니다. 토요일 밤이 되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주일예배후 점심식사를 하고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딸을 안아주는데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아마도 막내라서 더욱 그러했나 봅니다. 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거의 한 시간 단위로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빠, 왜?” “응, 그냥…”
이것을 보던 아내가 불쑥 29년전 신혼시절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장인어른이 시집간 큰 딸에게 매일 전화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어 결혼한 딸이 염려되어 매일 전화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말입니다. 아내는 저의 말이 내심이 섭섭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막내 딸이 보고 싶고 염려가 되어 한시간이 멀다하고 전화하는 것을 보고 핀잔을 준 것입니다.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입 다물었습니다. 이제 그 분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아비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