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Page 25)
“바디매오” : 고현권 목사
“바디매오”하면그앞에꼬리표처럼붙은말이“맹인”입니다.우리입에는“소경”이라는말이더익숙합니다만,사실소경이라는말은앞을못보는시각장애인을낮잡아부르는좋지못한표현이라고합니다.그러니맹인이라고부르는것이좋겠습니다.성경에보면바디매오는여리고에서구걸하던맹인이었습니다.그런데엄밀한의미에서그는이름이없는존재였습니다.이게무슨말일까요?예수님당시팔레스틴지역은아람어라는히브리어사촌쯤되는언어를공용어로사용하였습니다.예수님이하나님께기도할때에“아바아버지여”라고기도하셨지요.“아바”라는말은어린아이가 자신의아버지를친근히부르던아람어입니다.아람어로“바”는“아들”이라는뜻입니다.그러니“바디매오”는“디매오란사람의아들”이란뜻이되는것이지요. 이여리고의맹인은자신의이름이없이그냥그의아버지디매오의아들로만불려진것입니다.왜그는자기이름이없었을까요?추측해보면아이를낳고보니맹인이었습니다.아마도사람구실할수없다생각했겠지요.그래서이름을지어주지않은것입니다.이름이없다는것은그의존재자체를무시하는것과다름이없습니다.그렇게바디매오는그냥빌어먹다가죽으면끝나는인생으로여기고살아간것입니다.그러던어느날,나사렛예수가이곳을지나간다는소식을듣고서바디매오의가슴이뛰기시작했습니다.수많은병자들, 눈먼자들,저는자들을고치신예수님이자신이사는곳을통과하시는것입니다.이기회를놓치면안된다고생각하고힘을다해소리쳤습니다.“다윗의자손예수여나를불쌍히여기소서!”그러자주위사람들의책망이쏟아졌습니다.“잠잠해! 네주제에여기가어디라고?”그러나바디매오는아랑곳하지않고더욱소리를크게지르면서자신을불쌍히여겨달라고외쳤습니다.이에예수님이가던걸음을멈추고그의소원을들어주셨습니다.그결과그의눈이밝아져보게되는일이일어났습니다.그런데여기서주목할것은그의기도가응답된이유입니다.많은경우,그의열심과간절한부르짖음에주목합니다.물론중요합니다.그러나그의기도가응답받은유일한근거는“주님의긍휼히여기심”이었습니다.이것을알기에그가부르짖었던간구가“나를불쌍히여기소서”였던것입니다.바디매오처럼기도하시기바랍니다.“주여,나를긍휼히여기소서!”
“새일을행하시는하나님을바라보십시오!” : 고현권 목사
“희망고문”이라는표현이요즘도수많은젊은세대에게회자되고있습니다.희망을가지면가질수록더큰절망에이르게되니,아예희망이란단어를지워버려야한다는것입니다.성경에보면이와유사한희망고문에시달렸던사람들이나옵니다.바로바벨론에포로로끌려간이스라엘백성이었습니다.이들은처음엔소망을잃지않았습니다.언젠가는그리운고국으로돌아갈것이라는기대감을가지고힘든포로생활을견뎌냈습니다.그런데그들이직면한현실의벽은너무나높았습니다.세계최강대국인바벨론에서벗어나는것은불가능하게보였습니다.그래서어느순간부터포로에서해방되고고국으로돌아갈희망을접고말았습니다.이때하나님이이사야선지자를통해주신말씀이이사야43:18-19절입니다.“너희는이전일을기억하지말며옛날일을생각하지말라보라내가새일을행하리니이제나타낼것이라”여기“이전일”과“옛적일”은무엇을가리킬까요?이것은문맥상홍해사건을가리키는말입니다.그런데하나님이뭐라고말씀하십니끼?“그것은이미지나간옛날일이다.내가아예이전일을기억나지않도록완전히새일을행하겠다!” 하나님은우리의생각과상상을뛰어넘는방식으로일하시겠다는것입니다.하나님의일하심을이른바“스테레오타입”(stereotype)으로접근하지말라는것입니다. 이것이우리하나님의위대하심입니다.하나님이우리의생각과상상을뛰어넘는방식으로일하실수있는근거는무엇입니까?그것은이사야43:15절에나온대로우리하나님은창조주이시기때문입니다.하나님의천지창조의특징을한마디로표현하라면“무에서유로의창조”(ex nihilo)라고할수있을것입니다.하나님의새일행하심은오늘도계속됩니다.창조주하나님이우리가정안에새일을행하시면,과거의가정과자녀의모습이어떠하였든지간에그속에천국이회복될것입니다.전능자하나님이우리교회안에새일을행하시면,과거의교회모습이어떠하였든지간에사랑과화평의공동체가될것입니다.하나님은오늘도무에서유로,불가능에서가능으로새일을행하시는분이십니다.한해동안새일을행하시는하나님과동행하시는여러분이되시길소원합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 고현권 목사
“희망고문”이라는표현이요즘도수많은젊은세대에게회자되고있습니다.희망을가지면가질수록더큰절망에이르게되니,아예희망이란단어를지워버려야한다는것입니다.성경에보면이와유사한희망고문에시달렸던사람들이나옵니다.바로바벨론에포로로끌려간이스라엘백성이었습니다.이들은처음엔소망을잃지않았습니다.언젠가는그리운고국으로돌아갈것이라는기대감을가지고힘든포로생활을견뎌냈습니다.그런데그들이직면한현실의벽은너무나높았습니다.세계최강대국인바벨론에서벗어나는것은불가능하게보였습니다.그래서어느순간부터포로에서해방되고고국으로돌아갈희망을접고말았습니다.이때하나님이이사야선지자를통해주신말씀이이사야43:18-19절입니다.“너희는이전일을기억하지말며옛날일을생각하지말라보라내가새일을행하리니이제나타낼것이라”여기“이전일”과“옛적일”은무엇을가리킬까요?이것은문맥상홍해사건을가리키는말입니다.그런데하나님이뭐라고말씀하십니끼?“그것은이미지나간옛날일이다.내가아예이전일을기억나지않도록완전히새일을행하겠다!” 하나님은우리의생각과상상을뛰어넘는방식으로일하시겠다는것입니다.하나님의일하심을이른바“스테레오타입”(stereotype)으로접근하지말라는것입니다. 이것이우리하나님의위대하심입니다.하나님이우리의생각과상상을뛰어넘는방식으로일하실수있는근거는무엇입니까?그것은이사야43:15절에나온대로우리하나님은창조주이시기때문입니다.하나님의천지창조의특징을한마디로표현하라면“무에서유로의창조”(ex nihilo)라고할수있을것입니다.하나님의새일행하심은오늘도계속됩니다.창조주하나님이우리가정안에새일을행하시면,과거의가정과자녀의모습이어떠하였든지간에그속에천국이회복될것입니다.전능자하나님이우리교회안에새일을행하시면,과거의교회모습이어떠하였든지간에사랑과화평의공동체가될것입니다.하나님은오늘도무에서유로,불가능에서가능으로새일을행하시는분이십니다.한해동안새일을행하시는하나님과동행하시는여러분이되시길소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 : 고현권 목사”
한해를마감하면서주보칼럼을무슨내용으로할까를고민하던중에문득예수님의비유에나오는어리석은부자가떠올랐습니다.어느해자신의밭에서소출이풍성해지자부자는새로운창고를짓고거기에곡식들을꽉꽉채워넣었습니다. 그리고뭐라고말합니까?“내가내영혼에게이르되영혼아여러해쓸물건을많이쌓아두었으니평안히쉬고먹고마시고즐거워하자하리라.”(눅12:19) 그런데바로그순간에하나님이뭐라고말씀하십니까?“어리석은자여오늘밤에네영혼을도로찾으리니그러면네예비한것이뉘것이되겠느냐?”(눅12:20) 자신이영원히살며, 자신이가진것을영원히누릴수있겠다고생각하는사람을성경은어리석은사람이라고말합니다.그런데오늘날세상에이런어리석은바보들이얼마나많은지모릅니다.왜사람들이그토록모질게다른사람들의눈에서피눈물을흘리게만들면서부를축적할까요? 그것은자신이영원토록살며, 그물질이자신의행복을보장해준다고믿기때문입니다. 그러나예수님은말씀하십니다.“사람의생명이그가가진것의넉넉함에있지않다!”어떤분들은이렇게항변할지모릅니다.“돈을주체할수없는부자니까그렇게어리석게살지요.저처럼가난한사람이야그렇게살래도살수가없어요.” 그러나문제는무엇입니까? 당장손에잡히는부는없을지라도, 그마음속에돈이자신의삶을행복하게만들수있다고생각하여부하기를원하는사람역시어리석기는마찬가지입니다.저는이런사람을“가난한부자”라고말하고싶습니다.진짜지혜로운사람은누구일까요?항상오늘이우리에게허락된이땅에서의마지막이라는종말론적인시각을가지고살아가는사람입니다.그런마음을가질때에주어진하루를하나님앞에부끄러움이없이서려고자신을준비하며, 단한사람이라도나와불편한관계가남아있지않도록사랑하고용서하고화해하는데사용할것입니다.그러다가내일을주시면하루더연장된것으로여기고아직도내가하나님앞에서기에아직부족하고아직도더사랑해야할사람이남아서하루더덤으로생명을연장해주신것으로알고더열심히살것입니다.이것이지혜로운삶이요, 세월을아끼는삶입니다.
“빈방 있습니까?” : 고현권 목사
성탄절에교회에서가장많이공연되는연극을꼽으라면단연코“빈방있습니까?”일것입니다. 이것은미국의어느교회성탄축하행사에서실제일어난일이라고합니다. 랠프라는이름의약간의지적장애를가진친구가성극에참여하고싶었습니다. 고민하던선생님이랠프의형편을고려하여오직한마디만하면되는배역을골랐는데, 그것이베들레헴의여관주인역이었습니다. 그가해야하는대사는여관방을구하는요셉과마리아에게“빈방이없어요!”하고문을닫는것이었습니다. 수십번을연습한후에랠프는이대사를멋지게해냈습니다. 그런데문제는그다음에일어났습니다. 순간적으로연극과실제상황을혼동한랠프가대본에도없는말을뱉아버린것입니다. 방을구하지못해서돌아서는마리아와요셉에게“제방쓰세요!”라고외친것입니다. 그말에성극은뒤죽박죽이되고말았습니다. 그런데잠시뒤에이성극을지켜보던어른들의마음에큰감동이일어났습니다.누가복음2:7절에보면, 아기예수님을누일곳이없어서강보에싼채구유에뉘였다고되어있습니다. 그이유를이렇게밝힙니다.“이는사관에있을곳이없음이러라” 사관(舍館)이라는한자어는요즘에는거의쓰지않습니다. 이것은여관이라는뜻입니다. 많은영어성경도“inn”으로번역합니다. 그런데이말의헬라어의미는여관(inn)이아니라, 손님을위한사랑방(guest room)을뜻합니다.당시유대인들의가옥은대개이층구조였다고합니다. 위층은안방과사랑방으로사용되고, 아래층은마구간과마당으로되어있었다고합니다. 예상컨대안방은집주인가족이, 사랑방에는이미와있던손님들이차지하였을것입니다. 그러다보니출산을위해내어줄수있는공간은마구간밖에없을것입니다.여하간에이런사정으로아기예수님을강보에싼채구유에뉘이게된것입니다. 이런기막힌경우가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이것은예수님의생애를관통하는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자신에대해이렇게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머리둘곳이없다!” 그러나이것때문에불평하거나원망하지않으셨습니다. 이유는자신이이땅에오신목적때문입니다. “인자의온것은섬김을받으려함이아니라도리어섬기려하고자기목숨을많은사람의대속물로주려함이니라”(막10:45) 다시한번구유에뉘이신하나님의아들을묵상하길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