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가 익어가는 계절— 고현권 목사

홍시가 익어가는 계절— 고현권 목사

새벽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습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 사이로 깊어지는 가을빛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붉은빛으로 물든 홍시들이 햇살을 머금고 조용히 익어가고 있습니다. 홍시가 익어가는 계절, 그 풍경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애달프게 만듭니다.

  어느덧 고향을 떠나온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민족 대명절 한가위를 맞이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할아버지가 벽장 속 쌀독에 꼭꼭 숨겨두시며 익혀 놓았던 홍시입니다. 홍시는 서서히 익어갑니다. 떫고 단단한 분홍 감이 벽장 속 쌀독에서 무르익어갈 때, 달콤한 내음과 말랑말랑한 속살은 그제야 한껏 뽐내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고모, 삼촌 몰래 사촌 형제들 몰래 홍시에 담겨 익어갔습니다. 어른이 되고 지천명이 되어서야 홍시에 담긴, 할아버지의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고, 홍시가 익어갈 때면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함께 익어갔습니다.

  익는다는 것은 단지 시간만이 흐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픔을 견디는 일이고, 빛과 어둠을 함께 품는 일입니다. 너무 일찍 내놓으면 떫지만, 충분히 오래 묵히면 입속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함을 선사합니다. 성숙한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안에서 충분히 익은 사람은 말이 부드럽고, 마음이 따뜻하며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납니다.

  홍시가 익어가는 계절,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익어가면 좋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처럼, 한없이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고, 주어도 또 주고 싶은 그런 사랑으로 숙성되면 좋겠습니다. 세월의 바람 속에서도 믿음의 색을 잃지 않고, 감사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그런 삶 말입니다. 매일매일 느리더라도, 그 느림 속에서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의 계절이 아닐까요.

  오늘도 할아버지의 홍시를 그리워해 봅니다.

“주님 저도 조급하지 않게, 이 계절 속에서 당신의 손에 천천히 익어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