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애리시 이야기—고현권 목사

사애리시 이야기—고현권 목사

제가 지난 주보 칼럼에 “우리암과 우광복 부자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암 선교사에 대해 인터넷에 잘못 인용된 부분을 바로 잡아드렸습니다. 즉 프랭크 윌리암스(한국명 우리암) 선교사가 비를 피해 상여집에 들어갔다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은 사람을 장례하는데 사용된 상여에 몸이 닿는 바람에 감염되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그의 전임자로 공주에서 선교하던 로버트 샤프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샤프(1872-1906) 선교사는 원래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들어와 있던 캐나다의 노바 스코샤 출신의 앨리사 샤프(1871-1972, 한국명 사애리시)와 1903년 서울에서 결혼합니다. 1904년 공주로 파송된 이들 부부가 1905년 세운 학교가 명선여학당(후에 영명여학교로 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샤프 선교사가 1906년 2월에 강경과 논산 지역에서 전도하고 돌아오던 길에 진눈개비를 피해 문제의 상여집에 들어갔다가 그만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결혼한지 2년 반도 안된  가운데 남편을 잃은 사애리사 선교사는 슬픔을 딛고 당시 천대받던 여성 교육에 매진합니다.

사애리시 선교사가 1914년 천안 지역을 방문했다가 교회에서 12살된 소녀를 만났는데, 너무나 총명한 것을 보고 부모를 설득하여 자신의 양녀로 삼고 공주로 데려와서 영명여학교에서 공부시킵니다. 이 소녀가 바로 유관순 열사입니다. 공주 영명학교 뒷동산에 가보면 사애리사 선교사와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서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후에도 그를 통해 수많은 한국의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선생입니다. 1940년, 그녀의 나이 69세에 일제의 선교사 추방정책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몸은 미국 땅에 있었지만, 사애리사 선교사의 마음은 늘 한국의 공주에 가 있었고, 한국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1972년 10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의 피와 눈물과 생명의 헌신 위에 오늘 한국교회가 있음을 느끼면서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분들의 자취가 숨 쉬는 공주, 특별히 영명학교 동산을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